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중국-베트남 전쟁 (문단 편집) === 과정 === 베트남과 [[캄보디아]]는 양국의 공산화 직후인 1976년부터 지속적으로 국경에서 분쟁을 벌이고 있었고 상당한 규모로 확대되고 있었다. 중국-베트남의 틈새에서 캄보디아가 노골적으로 반베트남 정책을 취하자 베트남은 캄보디아의 "레짐 체인지"를 목표로 13개 사단 15~20만의 정예병력을 동원하여 1978년 12월 21일 본격적인 캄보디아 침공을 시작했다. 1월 7일 베트남군은 [[프놈펜]]을 함락시키고 "[[캄푸치아 인민공화국]]"이라는 괴뢰정권을 수립했는데, 베트남군 및 정부 수뇌부는 2월에 캄보디아 신(괴뢰)정부의 출범을 축하하기 위해 대거 캄보디아를 방문하고 있었다. 베트남군이 3주만에 캄보디아를 석권하는 동안 중국은 우방국 캄보디아에 아무 도움을 주지 못했다. 결국 2월 중국은 베트남 수뇌부가 캄보디아를 방문하는 것을 기회로 삼아 캄보디아 주둔 베트남군을 철군시키기 위해 1979년 2월 17일에 중국군도 베트남 침공을 시작했다. 중국군은 [[윈난성]]과 [[광시성]]에서 출발하였으며 베트남 산악지대와 정글을 재빠르게 돌파해 국경 너머 약 30km 정도를 공격하기로 하였다. 특히 이 전쟁은 베트남에 대한 '''[[경고]]''' 성격이 짙은 만큼 전략적 목표를 달성한 뒤에는 바로 철군할 생각이었으므로 전투 의지가 강하지 않았다. 그러나 베트남의 지형은 산악지대 너머로 넓은 평야가 펼쳐져 있었고 만약 산악지대가 뚫린다면 수도 [[하노이]]까지는 일사천리인 상황이었다. 중국군은 정글지대를 돌파하기 위해 인해전술에 가까운 밀어붙이기식 돌파 전략을 구사했다. 베트남군은 이를 간파하고 산 능선을 따라 강력한 방어진지를 구축했다. 진지에는 [[베트콩]] 출신들을 배치하고 각종 부비트랩들을 설치했으며 정글을 이용한 게릴라전을 펼쳤다. 원래 중국 침공군의 총지휘는 인민해방군에서 가장 지장으로 알려진 쑤위(1955년 대장)가 맡기로 되어 있었으나 쑤위가 건강이 안좋았기 때문에 [[광저우]] 군구 사령관이던 [[쉬스유]](1955년 상장)가 맡았다. 쉬스유는 1920년대부터 국공내전과 항일전쟁을 겪어 온 군인이었고 광저우-난징 군구 사령관으로 오래 재직해 왔다. 침공군의 참모장은 부수상 덩샤오핑이 직접 맡았는데 [[총참모장]]을 겸임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쉬스유나 덩샤오핑은 1940년대 말의 [[국공내전]]에서는 엄청난 활약을 해서 장제스군을 패퇴시키는데 한 몫 했지만, 당시에는 두 명 모두 70대에 접어들었고 모두 실전을 겪은 지 30년이 지난지라 군인으로서는 흘러간 인물이었다.[* 여기에 덩샤오핑은 국공내전 이후 군문을 떠나 정치가로 전직했다.] 이에 반해 베트남측의 지휘관인 [[반띠엔중]]은 1940년대부터 계속 일본-프랑스-미국-캄보디아와 전쟁을 치러 왔기 때문에 중월 양국은 지휘관부터 능력 차이가 확연했다. 중국군은 1950년대의 혼란과 빈곤 및 60~70년대의 [[문화대혁명]]으로 6.25 전쟁 이래 [[통신]] 장비나 전술이 지난 25년간 크게 발전하지 않은 상태였다. 반면 베트남군은 베트남 전쟁을 겪으면서 베트남의 지형에 맞추어 교리를 발전시켰으며 [[마오쩌둥]]의 국공내전 당시의 전술을 익혔기 때문에 중국군의 전술을 쉽게 간파할 수 있었다.[* 애초에 [[보응우옌잡]] 같은 사람도 사실 교육과 혁명가 커리어 초반은 대부분 [[운남육군강무당]]이나 [[황포군관학교]]에서 교육받으며 쌓았는지라... 민족보다 이데올로기 차원에서 보면 초창기에는 동고동락에 같이 혁명하며 성장했던 동아시아 사회주의권이 이제 커서 각 나라의 집권 세력으로 갈라서자 벌인 동족전쟁스러운 성격도 있다.] 베트남군은 미군에게서 노획한 [[M113]] 같은 [[장갑차]]나 미군의 군용 수송기, 헬리콥터를 이용해서 [[보병]]을 빠르게 수송, 재배치하였으며 거점을 뺏기기 전에 중국군의 위협으로부터 재빠르게 빠져나가 새로운 방어선에 투입하는 기동 전술을 사용했다. 전투 병력을 최대한 보전한 것이다. 베트남군은 소련제 [[대전차 미사일]]을 활용하여 개전초 24시간 동안에 중국의 [[63식 전차|63식 경전차]]를 13대나 격파했고 초기에 15대나 되는 중국군 항공기를 격추시켰다. 중국군은 진격이 지체되는 것에 초조함을 느끼고 예비부대 10만의 병력을 추가로 동원하여 총 20만의 병력을 규합해 대공세를 펼쳤다. 결국 베트남군의 방어선은 뚫리기 시작하였고 [[돈단]]과 [[몽카이]]가 중국군의 수중에 떨어졌다. 그러나 중국군은 2,000여 명의 병력을 손실했고, 40여 대의 기갑장비가 파괴되었다. 그에 비해 베트남군은 840여 명의 병력을 잃었을 뿐이었다. 게다가 베트남군은 역공을 시작하여 2월 28일에는 돈단을 다시 탈환하였다. 중국군 수뇌부는 이에 위기감을 느끼고 3월 1일부터 [[6.25 전쟁]]에 투입되었던 정예부대인 325사단과 338사단을 주축으로 란손을 공략했다. 중국군의 공격으로 많은 베트남군의 방어진지가 격파당했고 베트남군은 중과부적으로 밀리긴 했지만 전략적인 철수로 중국군에게 최대한의 손실을 입혔다. 결국 중국군 6만명의 집중공격으로 [[란손]]은 함락당했고 중국군은 란손을 조직적으로 파괴한 뒤 바로 철수했다. 3월 2일에는 중국군이 국경 인근의 라오카이도 공격하여 파괴하였다. 중국은 전략적 목표가 달성되었지만 예상보다 병력 손실이 많아 더 이상의 전쟁 지속이 무리라는 판단에 이르렀다. 어차피 완벽하게 승리하여 베트남을 굴복시키는 것이 목적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강대국인 중국이 전쟁을 벌인 이유는 캄보디아를 무단점거한 베트남군의 철군이었다. 중국은 앞서 언급된 지역에 대한 순간적인 점거는 가능했지만, 베트남의 주력군이 캄보디아에 있었다는 점과 인민해방군의 상대였던 베트남군은 대다수가 민병([[예비군]])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캄보디아에서 베트남군의 철수는 중월전쟁을 통해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그래서 실질적으로는 중국의 실패와 별 다를 바 없다. [[파일:attachment/victory.jpg]] 고지를 점령하고 환호하는 중공군의 선전 사진.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